MY & YOUR LIFE

오늘은 현장체험학습을 위하여 사전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저와 같이 동행한 사람은 제 첫째 아이입니다. 아이하고 둘이고 가는 여행이라니 참으로 기뻤고,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습니다.

 

답사코스는 공양왕릉-갑곶돈대-강화역사박물관-강화고려궁지입니다. 그 중 첫번째 코스인 공양왕릉에 대해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공양왕은 고려(918~1392)의 마지막왕으로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본인이 희망하지 않았지만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온건개혁파 정몽주 등과 함께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지만, 이성계의 5남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모든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즉위 3년 만에 강원도 원주와 간성에 유배되었다가 삼척에서 시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척에 묻혔다가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 다시 묻은 곳이 고양이라고 추정된다.

 

공양왕릉에 가면 그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고양시 공양왕릉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제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를 찾아 왕위를 맡긴다. 마흔 다섯이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평생 동안 먹는 것, 입는 것이 풍족했고 시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왜 내가 이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2년8개월 만에 고려가 아닌 조선의 왕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게 딘다. 공양왕은 이성계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을 예감하고 밤을 틈타 송도개성의 궁궐을 탈출해 무작정 남쪽으로 내달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사방이 캄캄해졌을 때 산 저쪽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어슴푸레한 그곳을 살펴보면 절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한 스님이 나와 물끄러미 왕의 행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렀다. "어찌하여 천하의 주인이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셨는지요?" 하지만 쫓기는 임금을 숨겨 주었다가는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어 스님은 공양왕에게 "저희 절은 위험하니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한 누각에 가 계시면 저희들이 매일 수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고 그 누각으로 가 절에서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이로 인해 식사(食寺)라는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의 모양이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 후 왕이 평소에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어느 연못 앞에서 자꾸 짖다 돌연 물속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못의 물을 퍼내어 보니 옥새를 품은 왕이 왕비와 함께 죽어있었다. 비통에 잠긴 친족들은 연못 뒤에 조그마한 봉분을 만들어 왕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 후 이곳은 왕릉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왕릉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개 모양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죽음으로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린 충견 삽살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공양왕릉의 전경입니다. 왼쪽이 공양왕릉이고 오른쪽이 공양왕릉비로서 쌍릉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좌우로 문인석, 무인석인 한 쌍씩 놓여 있습니다. 석물의 크기가 작아서 마치 동자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팔각장명등도 다른 왕릉에 비해 그 크기가 매우 작습니다.

 

그리고 위의 설명과 같이 장명등 앞에 삽살개라고 추정되는 석물이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호랑이라고도 중요한 것은 공양왕이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공양왕릉을 보고 있으면 세월의 무상함과 허무함이 느껴집니다.